며칠 전 문재인 대통령이 교황 프란치스코를 만나 방북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는 “초청장이 오면 응답을 줄 것이고
나는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교황의 첫 방북이 이뤄질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합니다.
북한은 1991년에도 교황 초청을 추진하면서 가톨릭 신자 한 명을 찾아냈다고 합니다. ‘과거 신자’였던 그 할머니는 처
음엔 신앙을 부정하다 “한번 마음속에 들어오신 하느님은 절대로 떠나지 않는다.”고 했다고 합니다.
지금 북한 내 지하교회 신도가 25만 명이 넘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조선시대 말에는 평안도와 황해도는 중국과 가까
워 상업과 신문화에 일찍 눈을 떴습니다. 이곳은 자유와 평등의식도 남달라 예수 신앙이 번성할 수 있는 토양이 됐습
니다. 1898년엔 전체 장로교 신자 7,500명 가운데 79%가 평안도와 황해도 주민이었습니다. ‘한국의 예루살렘’으로 불
렀던 평북 선천군은 1930년대 인구 절반이 기독교인이었다고 합니다.
일본제국주의는 1911년 독립 세력을 탄압하려고 애국지사 105명을 체포해 고문했는데 대부분 평안도 신자였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도 황해도 천주교인이었습니다. 1935년에는 평양 기독교계 학교 교장들이 단체
로 ‘신사 참배’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해방 후 공산주의 탄압은 일제보다 더 모질고 가혹했습니다. 신자들은 반체제
인사로 찍혀 전 재산을 빼앗겼고 재판 없이 처형당했습니다. 6.25 한국전쟁 전에 북한에 3,000개 이상의 교회가 있었
는데,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없앴습니다. 지금도 성경을 갖고 있다 적발되면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갑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자기의 어머니인 강반석이 교회에 다닌 사실을 밝혔습니다. 그의 외삼촌인 강양욱이 목사였고,
김일성도 어릴 때 주일학교에 다녔다는 말도 있습니다. 기독교 가정이었던 그가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면서 ‘종교는 아
편’이라고 하면서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미국에 대한 주민 적개심을 부추겨 그걸 기독교인에게 돌리
는 수법을 썼습니다. 1968년에는 “인민공화국에서 종교는 완전히 멸절됐다”고 선언했습니다. 저들은 신(神)이 있어야
할 자리에 대신 ‘김씨 일가’를 올려놨습니다. 그러던 김일성이 1988년에 갑자기 평양에 봉수교회와 장충성당을 세운
것은 “1980년대 한국 민주화 운동에 종교 단체들이 적극 나서는 것을 보고 이들을 포섭하려는 통일전선 차원”이라고
태영호 전 북한 공사가 말했습니다.
교황이 옛 ‘신앙의 땅’ 북한에 간다면 주민 마음속에 숨겨진 신앙의 불씨가 되살아날지 지켜보아야 합니다.
이 글은 어제 모 일간지에 실린 내용을 참조하였습니다.